작가의 말
진화심리학자인 데이비드 버스는 그의 저서 이웃집 살인마에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주장을 펼쳤다. 인간은 악하게 태어난 것도 선하게 것도 아니다. 인간은 생존하도록 태어났다. 생존과 번식을 위해서는 진화과정에 적응해야 한다.악은 우리 유전자에 내재된 어두운 본성이다. 그리고 악인은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라 나를 포함한 누구나 일 수 있다.
어느 봄 멀쩡하게 생긴 스물세 살의 청년이 부모를 살해해 세상을 경악시킨 사건이 있었다. 미국유학을 떠났다가 거액의 도박 빚을 진 채 한국에 돌아온 그는 너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놈이라는 아버지의 질책에 격분해 범행을 결심하고 아버지를 50여 차례 어머니를 40차례나 칼로 찔러 죽였다. 더하여 잠든 조카가 있는 집에 불을 질러 증거를인멸해버렸다. 나는 이 청년의 정체가 궁금했다. 아직 사이코패스라는 용어가 보편화되지 않은 시절이었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구축되기 이전의 세상이었다. 그에 대해 알수 있는 건 언론과 방송이 매일같이 쏟아내는 뉴스가 전부였다. 100억이 넘는 부모의 재산을 노린 범죄다, 사건 이후 태연하게 금고를 옮기고 마당을 청소했다, 장례식장에서 여자친구와 웃으면서 놀고 있었다, 체포된 후로도 거짓진술로 인관한다, 범행을 반성하는 대신 부모 탓을 한다며 기사화가 되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아직 젊었다. 그런 만큼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도 사고도 미성숙했다. 그러므로 이 특별한 악인 의 특별한 악행을 이해 할수 없었다. 그의 내면이나 진짜 추측해보는 것은 더욱 불가능했다. 당시 심취해 있던 프로이트에게서 미약한 실마리 하나를 얻었을 뿐이다. 실마리는 얻었으나 궁금증은 해결되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 본성의 정체애 대한 근본적인 의문만 얻었다. 내 관심사는 오랜 기간에 걸쳐 프로이트에서 정신병리학으로 뇌과학에서 범죄심리학으로 진호 생물학에서 진화심리학으로 범위가 확장되었다. 이 과정에서 나는 이해할수 없었던 그때의 특별한 악인을 종종 떠올리곤 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유진이 수정란의 혈태로 내 안에 착상된 셈이다.
소설의 나는 작가인 나와 함께 진화해가고 있다. 피식자에서 포식자로 변화해 가는 과정을 의미 있게 나아가 그럴 법하게 형상화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나는 새 노트를 장만하고 기억나지 안는 누군가의 말을 인용해 이렇게 썼다.
"나는 마침내 내 인생 최고의 적을 만났다. 그런데 그가 바로 나인 것이다."
이제는 마음먹은 대로 쓸 수 있겠다. 생각은 오만이었다. 당황스러웠다. 습작을 막 시작하던 시절처럼 막막하고 혼란스러웠다. 종기원은 평범했던 한 청년이 살인자로 태어나는 과정을 그린 악인의 탄생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평범한 비둘기라 믿는 우리는 본성 안에도 매의 어두운 숲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똑바로 응시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지 못한다면 우리 내면의 악, 타인의 악, 나아가 삶을 위협하는 포식자의 악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분신 유진이 미미하나마 어떤 역할을 해주리라 믿고 싶다.
태양은 만인의 것, 바다는 즐기는 자의 것.
역시나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영화인지 책인지에서 나온 문장이다. 책을 편 독자들에게 마냥 즐겁지만은 않은 여정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렇기는 하나 이갸기 자체로서 혹은 예방주사를 맞는다는 기분으로 부디 즐겨주었으면 한다.
책 속 문장
비로소 뭐가 잘못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경험해보지 않았던 것, 스스로 부른 재앙, 발작전구증세였다. 운명은 제 할 일을 잊는 법이 없다. 한쪽 눈을 감아줄 때도 있겠지만 그건 한 번 정도일 것이다. 올 것은 결국 오고, 벌어질 일은 끝내 벌어진다. 불시에 형을 집행하듯, 운명이 내게 자객을 보낸 것이었다. 그것도 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_ 본문 139쪽
내 몸은 소리를 죽이기 시작했다. 숨 쉬듯 욱신대던 뒤통수가 평온을 되찾았다. 숨소리는 목 밑으로 잦아들고, 갈비뼈 안에선 심장이 느리게 뛰었다. 배 속에서 공처럼 구르던 긴장이 사라졌다. 오감이 날을 세웠다. 몇 미터 거리가 있는데도, 겁먹은 것의 축축하고 거친 숨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세상이 엎드리는 기분이었다. 모든 것들이 길을 열고 대기하는 느낌이었다. _ 본문 283쪽
폭풍을 피할 항구 같은 건 없다. 도착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폭풍의 시간은 암흑의 시간이고, 나는 무방비상태로 거기에 던져진다. 널리 알려진 대로, 과정을 기억하지도 못한다. 의식이 스스로 깨어날 때까지 길고도 깊은 잠을 잔다. _ 본문 283쪽
침묵은 오래도록 계속됐다. 거대한 물벽 같은 침묵이었다. 덮쳐누르는 압박에 몸이 짜부라드는 듯한 침묵, 냉엄하고, 가차 없고, 무시무시한 침묵, 지나가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침묵. 슬금슬금 좌절감이 스며들었다. 누가 뭐라고 하든, 내가 무슨 짓을 했든, 이놈만은 내 편에 서주리라는 기대가 조금씩 꺾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기다렸다. 어쨌든 한마디는 하겠지. -본문 339쪽
운명은 제 할 일을 잊는 법이 없다. 올 것은 결국 오고, 벌어질 일은 끝내 벌어진다.
느낀점
악은 어떻게 존재하고 점화되는가? 정유정의 작품들은 넓은 바다와 들판에서 죽을 힘을 다해 적과 싸우는 전사의 투지와 고민에 가깝다. 우리들 무의식의 폭려성, 악의 공존에 치열하게 맞서,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소설에서 작가는 영혼이 사라진 인간의 내면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정밀히 관찰하고 이갸기를 전개해 나간다. 인간 심성의 황폐함이 이렇게까지 극단으로 치달릴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고 날것 그대로를 보여준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오싹하고 또 한편으로는 슬프다. 파괴된 젊은 영혼에 대한 애정과 연민은 사람들로 하여금 악인을 복잡한 심정으로 지켜보게 만든다. 혼란 이후 몰려오는 애정 어림. 이 양가감정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럼에도 작가는 세상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음이 분명하다. 미래에 대한 장밋빛 전망 그 자체에 분노하는 이들이 더 많아진 시대, 종의 기원은 말하고 있다. 어린 시절에 형을 고의로 죽인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고 그것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어른의 시각에서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이코패스의 심리를 조금이나마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고 할까? 우리 내면의 무의식을 솔직하게 들여다보고 영혼의 아름다움을 되찾을 수 있도록 고민해본다.